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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3

2010년, 가을, 친구의 꿈 4호선 끝자락에 있는 정왕역 근처에서 살았다. 나는 자주 가던 카페에서 일했다. 퇴근하면 밤 열 시쯤 되었다. 4호선은 항상 사람이 많았는데 내가 내리는 정왕역쯤 되면 한산해졌다. 한 번은 퇴근하고 집에 들어갔는데, 엄마가 여자친구는 어디 사느냐고 물었다. 난 그런 생물은 키우지 않았기에 없다고 대답했다. 그럼 전철에서 서로 기대 자던 여자는 누구냐고 엄마가 되물었다. 나도 낙엽 지고 해도 홍시처럼 익었던 그해 가을, 서로의 온기로 피로를 달래던 그 여자의 얼굴이 몹시 궁금했다. 2010년은 혼자서 영화를 처음 본 해이기도 했다. 카페에 출근하려 옷을 입으며 티브이 화면을 보고 있었다. 영화 ‘인셉션’의 예고편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아, 저건 꼭 보고 싶은데? 개봉이 언제지? 그때까지 같이 볼 아리따.. 2024. 1. 5.
등목 무슨 나무였는지 모르겠다. 바람이 몹시 불었다. 바람에 나뭇잎들이 차륵차륵 부딛쳤다. 소나기가 내리는 것만 같은 시원한 소리였다. 나무가 아니라 숲이었고 여름밤이었다. 군대였다. 난 병장이었다. 시간은 0시쯤이었나? 독서실이었다. 책을 읽었다. 소설, 시, 자기계발. 영어 단어와 한자를 외우기도 했다. 공부는 해 본적 없었다. 고졸에 피시방과 알바를 전전하다 입대했고 곧 제대였다. 그래서 군대에서 책을 읽었다. 노크도 없이 몇 평 되지 않는 독서실의 문이 열리고 영화가 고갤 들이밀었다. “역시, 너 있을 줄 알았다.” 난 ‘웬 일이야?’라고 말했던 것 같다. 영화는 내 동기고 친했던 적은 없었다. 내 동기들은 모두 친하지 않았다. 희생이란 말은 천국처럼 멀고 서로 의지한 기억도 없이 병장이 되기까지 비겁.. 2023. 9. 1.
9층의 나라 아파트 십오 층을 오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빨간 글씨의 고장이란 명찰을 달고 꼿꼿하게 낮잠을 때리고 있었다. 평소 체력엔 자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이상일뿐 지팡이에 의지하는 노인처럼 계단 손잡이에 늘어지고 있었다. 유행이었던 찢어진 걸레짝 같은 청바지와 혓바닥을 내민 롤링스톤즈 로고가 가슴에 새겨진 흰 티가 몸에 질척거렸다. 아마 매력적인 소녀를 집에 바래다준 뒤 돌아오는 길은 아니었고 파스타집 알바나 피시방에서 오는 중이었을 것이다. 갈아입을 옷도 별로 없었지만 어딜 가든 되지도 않는 간지를 뽐냈던 것이다. 한 번은 친구들 약속에 평소 가지 않던 중심가의 피시방에 갔는데 “제 것만 계산할게요, 34번인가?”하자 카운터를 보는 여직원이 말했다. “성포동 김간지 씨 맞으세요?” 이름을 부르는 여직원.. 2023. 3.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