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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등목

by 찬0 2023. 9. 1.

 
무슨 나무였는지 모르겠다. 바람이 몹시 불었다. 바람에 나뭇잎들이 차륵차륵 부딛쳤다. 소나기가 내리는 것만 같은 시원한 소리였다. 나무가 아니라 숲이었고 여름밤이었다. 군대였다. 
 
난 병장이었다. 시간은 0시쯤이었나? 독서실이었다. 책을 읽었다. 소설, 시, 자기계발. 영어 단어와 한자를 외우기도 했다. 공부는 해 본적 없었다. 고졸에 피시방과 알바를 전전하다 입대했고 곧 제대였다. 그래서 군대에서 책을 읽었다. 
 
노크도 없이 몇 평 되지 않는 독서실의 문이 열리고 영화가 고갤 들이밀었다. 
 
“역시, 너 있을 줄 알았다.”
 
난 ‘웬 일이야?’라고 말했던 것 같다. 영화는 내 동기고 친했던 적은 없었다. 내 동기들은 모두 친하지 않았다. 희생이란 말은 천국처럼 멀고 서로 의지한 기억도 없이 병장이 되기까지 비겁하고 비열한 모습만 봤다. 
 
“무슨 책 보냐?”
 
‘그냥 뭐 소설.’이라 말했을 것이다. 영화는 뭔가 용무나 부탁이 있을 것이다. 내가 무슨 책을 보는 지는 이 년이 거의 다 된 지금까지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영화는 책상 옆 칸에 앉았다. 편지에 관심도 없는 날씨 이야길 쓰듯 멀리 돌고 도는 이야기로 내 독서를 방해했다. 
 
‘야, 할 말이 뭔데.’ 아마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너무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바로 뒤에 ‘담배 피러 갈래?’라고도 말했던 것 같다. 
 
“너 기억 나냐? 내 여자친구가 나보고 제대 전에 운동 좀 하라고 했던 거. 갑자기 웬 운동이냐니까, 피시방에 갔는데 알바하는 애 팔이 멋지다면서.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기억난다. 근무 나간 인원을 제외한 모든 인원이 모여있던 휴게실에서 어줍잖은 기강을 잡고 있을 때였나. 아무도 듣고 있지 않았는데, ‘피시방 알바한테 관심 있는 걸까? 잘생겼을까? 동생이라던데 군대도 안 간 새끼가. 아냐, 그냥 말 그대로 내가 몸 좀 만들었으면 하는 거였겠지. 여자들이 나중엔 얼굴보다 몸을 본다든데 여자친구도 이제 바뀌는 건가?’했던 거. 
 
“어, 기억 나. ” 알 것 같았다. 영화 여자친구와 피시방 알바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거라는 걸. 
 
영화는 탈영 의지를 드러내는 것을 시작으로 여자친구에게 처음 반한 일과 설레던 데이트와 여행, 첫 싸움 등 몇 가지 일화를 들려주었다. 영화의 여자친구가 얼마나 예뻤는지 얼마나 서로 좋아했고 특별했는지 내게 또는 자신에게 증명하려는 것 같았다. 
 
한 시간이 조금 더 지났을 때쯤 영화는 더 말이 없었다. 카세트 테잎처럼  잠시 덜컥이며 새로운 일화들을 꺼냈지만 이제 음악이 끝난 것 같았다. 불침번 근무자가 휴게실에 들어 와 우리 신원을 확인하고 복도로 나갔다. 열 개피 가량의 담배가 재떨이에 쌓였다. 몽당한 꽁초들이 찌그러지고 허리가 굽거나 부러진 채 아무렇게나 누웠다. 마지막에 끈 담배에서 리본 같은 연기가 천장을 향해 풀어졌다. 불을 꺼 휴게실은 어두웠지만 커다란 세 개의 창에서 빛이 들어왔다. 처음 휴게실에 앉았을 땐 창가만 보인다고 느꼈는데 어둠에 적응하자 빛이 당구대 안에 정리하지 않은 당구공에까지 어렴풋이 닿는 게 보였다. 뚜국 뚜국, 가끔 복도를 걷는 불침번 근무자의 군화 소리가 들렸다. 내내 소나기 같은 나뭇잎 소리가 들렸다. 
 
“야, 등목할래? 내가 시원하게 물 뿌려 줄게.” 영화가 말했다.
 
“지금...? 그래.” 두 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무슨 등목이냐 가서 잠이나 자라고 말할 뻔 했다. 평소라면 그랬을 것이다. 영화는 잠이 오지 않을 것이고 잠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지금 시간을 테이프 늘어지듯 늘리고 싶을 것이고 내게 조금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스무 명은 한 번에 씻을 수 있는 샤워실에 영화와 나 둘 뿐이었다. 팬티바람에 서로 번갈아 엎드리며 등에 바가지로 물을 뿌려줬다. 영화와 난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샤워실 벽에 튕기며 더 커졌다.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농담을 했는지 왜 몸을 흔들거리며 웃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엎드린 채로 차갑다고 몸서리치는 내 등에 손을 문지르고 다 됐다고 찰싹 때리는 영화의 손을 희미하게 기억한다. 그 손에 영화의 다양한 감정이 묻어났다. 
 
“야, 근무 교대하나 보다. 이제 진짜 자러 가자. ”
 
“알았어, 담배 한 대만 딱 피우고 진짜 가자.”
 
내무반들의 문이 열리고 군화소리가 겹치며 허겁지겁 근무 교대자들이 나왔다. 영화와 나만 서 있던 복도가 부산스러워졌다. 
 
“야, 비나 왔으면 좋겠다. 진짜 시원하게.”
 
“그러게.”
 
복도에 모인 근무 교대자들은 인솔자와 인원을 파악하고 모두 1층으로 내려갔다. 멀어지는 무거운 군화소리들과 함께 복도와 계단이 경미한 지진처럼 흔들렸다. 불침번 근무자가 군모를 벗고 머리를 긁으며 우리에게 걸어왔다. 
 
“두 분 아직도 안 들어가셨습니까? 그리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밖에 비 엄청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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