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문

당신의 무진은 어디인가요 <무진기행>

by 찬0 2023. 10. 7.

 

무진기행을 읽었다. 이십 대와 삼십 대에 한 번씩 그리고 최근 두 번 정도 더 읽었다. 처음 김승옥을 알게 된 건 스물네다섯쯤이다. 당시 일부러 여러 소설들을 찾아 읽고 있었다. 유명한 국내외 고전소설들을 검색하며 조금씩 읽는 중에 김승옥의 다른 단편 소설인 '서울 1964년 겨울'을 만났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지금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자면 음침하고 우울하고 새로웠다. 가슴이 답답했다. 작가 본인이나 지인이 겪은 일처럼 느꼈다. 이 소설을 한 번 더 읽은 뒤에 무진기행을 찾았다. 
 
무진기행을 읽고 난 뒤 컴퓨터 키보드로 두 번의 필사를 했다. 손으로 쓸 만큼 부지런하진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소설을 읽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모래사장에 빛나는 유리조각처럼 느꼈다. 어떤 이성을 돌아보는 것과 우연한 문장에 눈이 오래 머무는 일과 비슷한 것 아닐까. 영화평론가 이동진도 이십 대에 무진기행을 두 번 정도 필사한 경험이 있다는 이야길 들었다. 난 무진기행이나 김승옥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고 한 행동이었으니 소설이 그만큼 매력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p11

버스는 무진 읍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기와지붕들도 양철지붕들도 초가지붕들도 6월 하순의 강렬한 햇볕을 받고 모두 은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철공소에서 들리는 쇠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잠깐 버스로 달려들었다가 물러났다. 어디선지 분뇨 냄새가 새어 들어왔고 병원 앞을 지날 때는 크레졸 냄새가 났고, 어느 상점의 스피커에서는 느려 빠진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사람들은 처마 밑의 그늘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빨가벗고 기우뚱거리며 그늘 속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읍의 포장된 광장도 거의 텅 비어 있었다. 햇볕만이 눈부시게 그 광장 위에서 끓고 있었고 그 눈부신 햇볕 속에서, 정적 속에서 개 두 마리가 혀를 빼물고 교미를 하고 있었다. p16

나는 그 방에서 여자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군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 주었다. p39

<무진기행>, 김승옥, 민음사(1980)

 

 

김승옥은 1941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1945년에 귀국해 전남 순천에서 성장했고 1962년 한국일보 신문문예에 단편 '생명연습'으로 등단했다. 그의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칼의 노래를 쓴 소설가 김훈의 수필 ‘라면을 끓이며’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던 김훈의 아버지가 동료 작가들과 밤새 술을 마시고 있었다. "너 김승옥이라고 들어 봤냐?" "스물셋이라더라." "이제 우리 시대는 갔다." 아버지와 친구들은 김승옥이라는 벼락에 맞았다고 김훈은 적었다. 

김승옥이 다른 작가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우리는 왜 소설을 읽을까. 과학이 더 중요하다고 인문학은 나이가 든 후에 알아가도 괜찮다는 과학자의 의견을 봤다. 소설은 꼭 읽어야 하며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재밌으니까."라고 말하는 게 가장 정답일지도 모른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 있다. '문학은 다른 매체보다 직접적인 체험을 선사하는 데 가치가 있다고.' 영화나 유튜브의 짧은 영상도 공감과 감동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경험을 주진 않는다. VR이 이런 역할을 더 뛰어나게 대체할지도 모르지만 감상자가 이미지의 주체가 되지는 못하기에 문학과는 또 다르지 않을까. 무진기행에서 문학 장르 전체까지 확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내가 '체험한 것만 같은'느낌을 다른 매체보다 더 받았기 때문이다. 무진으로 가는 버스와 거리, 바다와 개구리울음, 주인공 윤희중의 분노와 우울, 나와는 다르지만 비슷하기도 한 그의 시선과 감성.

"김승옥이 글을 쓰는 모습을 기억하느냐."는 물음에 그의 동생과 동료가 대답한 일이 있다. 그 둘은 각자 다른 년도에 목격한 김승옥을 묘사했는데 그 답변이 거의 같다. "방안엔 구겨진 종이가 가득했다. 김승옥은 피가 흐르는 이마를 계속 긁고 있었다. 글은 몇 줄 쓰여 있지 않았다." 

최근 무진기행을 다시 읽은 것은 두 달쯤 전 동네 카페에서다. 약 삼십오 페이지 정도로 짧은 소설이지만 다 읽자 한 시간쯤 지났다. 책은 아홉 편의 다른 단편소설이 더 실려 있는데 무진기행 한 편만 읽고 책을 덮었다.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 카페 안을 둘러봤다. 카페에서 의도한 더러운 천장과 갓을 쓰고 매달린 누런 전등들. 내 맞은편엔 영상통화하는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수화를 하고 있었다. 오십 대 후반에서 육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는 손으로 활시위를 당기는 시늉을 했다. 투수를 답답해하는 포수처럼 손가락을 접었다 펴기도 했다. 투수에게 직구가 아닌 변화구를 요구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화를 내고 짜증 내다가 호소하고 있었다. 힐끔힐끔 그 남자를 오래 훔쳐보다가 휴대폰에 생각 없는 메모를 적어나갔다. 

<나는 유부남이다. 처자식도 있다. 한탄하고 다짐하며 그럭저럭 지낸다. 젊을 땐 꿈이 있었던 적도 있지만 포기했다. 아니, 버렸다. 착각이었다. 그건 내 꿈이 아니었다. 갑자기 어떤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내게 벼락처럼 아름답다. 눈을 마주하면 동공이 커지고 가슴이 떨린다. 내게 악마 같은 존재다. 나는 일부러 눈길도 발길도 그녀를 피한다. 그런데 그녀가 회사 앞으로 찾아온다. 회식 중간에 밖에 나가 담배를 물거나 취한 채 집에 다다르면 또 나타난다. 안아달라 한다. 날은 춥고 불빛은 그녀 입술을 비춘다. 그녀는 얕은 숨결을 뱉고 절벽에 몸을 던지듯 위태한 몸짓으로 내게 안긴다. 나는 그녀를 안는다. 품에 안은 그녀가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귓가에 말한다. "너 진짜였던 적 없어. 그때도 지금도.">

가장 아름다운 한국어를 쓴다는 평을 받았던 김승옥은 노년에 언어능력 대부분을 상실했다. 뇌졸중이었다. 한 방송에서, 인터뷰어가 김승옥과 함께 정자 위에 앉았다. 인터뷰어가 물었다. "무진기행을 쓰는 데 얼마나 걸리셨어요?" 김승옥은 말로 대답하려 했으나 어려워했고 종이 위에 천천히 이렇게 썼다. 

3월 봄 ~ 7월 여름.

인터뷰어가 다시 물었다. "무진기행이 발표된 지 육십 년이 다 됐는데요. 지금 시대 청년들도 이 소설을 읽고 감명받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 있으세요?" 김승옥은 다시 종이 위에 천천히 글을 썼다. 

고맙습니다.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리안 좀비> 사람이 되다  (0) 2023.10.12
MBTI에 대한 짧은 단상  (2) 2023.10.11
행복의 비결은 성장과 감사라든데  (4) 2023.10.04
<구정 이야기>  (4) 2023.09.25
아버지의 ‘무빙’  (2) 2023.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