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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행복의 비결은 성장과 감사라든데

by 찬0 2023. 10. 4.

 
시골에 다녀왔다. 시골에서 엄마와 누나와 김장했다.
누나와 난 둘 다 인천에 살고 있는데 내가 차가 없기에 시골에 갈 땐 보통 누나가 태워준다. 난 원래 차만 타면 잠드는데 아무래도 시골까지 운전하는 누나에게 미안해 졸음을 참는다. 우린 시골에 가는 동안 차 안에서 음악도 라디오도 듣지 않고 서로 수다만 떤다. 출발한 지 삼십 분 정도 지났을 때 내가 누나에게 말했다. 

"얼마 전에 이사님이랑 출장 갔다 왔거든? 가는 데 한 시간 반 정도 거리라 서로 아무 말도 안 하면 어색하잖아. 이사님이 먼저 말하시더라고. '퇴근하면 뭐 해? 저녁은 어떻게 먹어? 요리해서 먹기도 하니?' 나는 예능이나 드라마를 보기도 하고 요리를 하거나 배달 음식을 먹기도 한다고 답하고선 나도 이사님에게 물었어. '이사님은 주말이나 시간 여유될 때 즐기는 취미가 있으세요?'하고. 이사님은 주로 낚시를 즐긴다고 답하셨는데 내가 또 물었어. '전 낚시 전혀 모르거든요. 고기 낚을 때 손맛을 좋아하시는 거예요? 낚시터 분위기를 좋아하시는 거예요?' 내 말에 이사님이 이렇게 대답하셨는데 그 말이 인상적이더라고. '아, 난 밤낚시만 가는데 앉아 있으면 강물이고 풍경이고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여. 낚시찌만 보이지. 그 불빛을 보고 있는 게 좋아.' 

내가 말했어. '낚시찌 불빛이요? 와, 뭔가 근사하고 운치 있네요. 그런 말을 하실 줄은 몰랐어요. 음, 관련 있는 이야긴지 모르겠는데 오래전에 힐링캠프인가? 티브이 프로를 본 적 있어요. MC인 이경규가 게스트인 한석규에게 물었어요. '살면서 가장 좋았거나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다면 어떤 거예요?'하고. 한석규는 잠깐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아버지와 밤낚시하던 날이었는데 비가 많이 내렸어요. 아버지랑 서로 말없이 비 맞으며 강만 보고 앉아 있었는데 그게 참 좋았어요.'라고. 이사님은 살면서 그런 한 장면이 있다면 어떤 거예요?'

나는 말을 멈추고 컵홀더에 있는 얼마 남지 않은 커피를 빨대로 쪼록 마셨다. 그리고 휴대폰을 잠시 들여다보자 누나가 물었다. "그래서 이사님이 뭐라고 했어?"

"대답은 못 들었어. 거래처 전화가 왔거든. 아, 누난 어때? 누난 살면서 가장 좋았거나 기억에 남는 장면 있어? 있다면 어떤 거야?"

운전대에 양손을 붙이고 눈은 도로만 응시한 채 누나가 대답했다. 한참 생각하고 나서 말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누나는 곧바로 입을 뗐다. "우리 시골살 때 말야. 터미널 앞에 살았던 적 있어. 아빠는 철물점 했는데 정문이 철문으로 돼 있었고, 맞아, 문이 참 작았어. 통로처럼 철물점 후문을 빠져나가면 우리 집이 나왔고 마당엔 셰퍼드 두 마리도 있었고. 그 집 살 때 내가 피아노 치면 꼭 니 형이 옆에 앉아 노래 부르곤 했는데 그게 떠오르네."

"뭐? 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난 그때 '나도 노래 잘할 수 있는데 왜 난 껴주지 않는 걸까.'생각했어. '누난 피아노는 잘 치는데 노래는 잘 못하는구나, 형은 노래를 참 잘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했고. 이문세 노래였어, 그대와 영원히. 꿈결 같네. 왜 지난주에 있었던 일도 거의 잊어버리는데 그런 기억은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걸까? 나도 살면서 가끔 누나와 형이 있는 그 방을 떠올린 적 있거든? 언제부턴가 이게 진짜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 희미해서 잘 모르겠는 거야. 근데 누나도 기억한다니 다행이네." 

"그래? 난 니가 그 방에 같이 있었다는 기억은 없는데."

그 집에 살 때 도둑이 들었다. 집엔 형과 나만 있었다. 난 형과 방을 같이 썼고 둘 다 자고 있었다. 도둑이 방에 들어왔고 실수로 내 발을 밟았다. 크게 아프진 않던 통증. 내 귓가에 '조용히 해.'하고 말한 형의 속삭임과 도둑을 향해 "씨발새꺄!"하고 냅다 소리 지른 형의 목소리. 집 밖을 향해 거실을 뛰는 도둑의 뒷모습과 뒤쫓아 나가는 형의 뒷모습. 내가 기억하는 건 이게 전부다. 난 누나는 전혀 모르는 에피소드라고 생각해 이 이야길 들려주었다. 그런데 누나도 그날 그 집에 있었다고 한다. 도둑이 누나 목에 칼을 대고 집에 또 누가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우리는 여러 번의 명절을 함께 했다. 그때마다 시골 가는 차 안에서 많은 이야길 나눴지만 어릴 적에 대해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누나가 국민학교 때 외갓집에 몇 년 살았는데 논밭과 저수지를 지나 먼 길을 걸어 학교에 갔다고 들려주면, 나는 하교 후에 누나가 말한 그 저수지에서 수영을 자주 했고 형한테 들켜 뒤지게 맞았다고 이어받았다. 그 저수지는 엄마 어릴 때 친구들도 빠져 죽었고, 물귀신이 발을 잡아당긴다는 말들이 오래되었다. 
 
누나는 여름에 외가와 친가, 고모를 뵙고 왔다고 했다. 고모를 뵐 때 과일과 용돈을 드렸는데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울음 섞인 고모의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고모, 내 팔과 볼을 깨물고 세게 껴안아 놔주지 않던 고모. 어렸던 난 고모를 만나는 싫었는데. 마지막으로 뵌 게 십오 년 전쯤 됐나.
 
부모님이 계신 시골이 몇 킬로 남지 않았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차는 곧 시내에 들어섰고 쉴 새 없이 나누던 차 안의 수다는 멈췄다. 동에서 리로 들어가는 좁은 길목에서 누나가 말했다. "난 어른들 뵐 때마다 이런 생각해. 이번이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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