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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고흐와 엄마

by 찬0 2023. 12. 25.

반고흐 / 밤의 카페테라스(1888), 위키미디어 커먼스

 


퇴근하고 밥도 먹고 드라마 요약도 보고 커피도 마시고 엎드려 누웠다. 쉬운 책을 읽고 싶었다. 전에 골라 놓았던 책 중 만화가 눈에 띄었다. 글 그림, 바바라 스톡 / 번역, 이예원의 그래픽 노블 ‘반 고흐’였다. 

만화라서 보기 편했다. 만화라면 중학교 때 학원 선생님이 "이제 학원도 방학인데 넌 뭐 할 거야? "라고 물었던 게 생각난다. "만화책 스무 권 쌓아놓고 읽을 거예요. 머리맡엔 전기난로 켜 놓고 컵라면에 아이스크림에 귤도 먹으면서. 그러다 잠들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뭐? 나랑 똑같네? 너 벌써 인생을 아는구나.”했었다. 

책에서 눈에 띄었던 점은 고흐가 상대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늘 자기 이야길 늘어놓는다는 점이다. 동생인 테오와 친구였던 우체부 조셉 룰랭을 제외하면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 듯 보인다. 테오조차도 형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부담스러워하고 귀찮아하는 면도 있다는 표현이 드러나있다.

프랑스 아를에서 동생인 테오에게 금전적 지원을 받으며 오직 그림만 그리며 지내는 고흐는 노란색 물감을 살 돈이 없어 다른 색상을 사용하기도 한다. 화가공동체를 꿈꾸었고 그 중심에 고갱을 두고 싶어 했다. 바라던 대로 고갱이 그에게 오자 함께 먹고 자고 그림을 그리며 지냈지만 이상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갱은 얼마간의 돈이 모이자 타이티로 떠나겠다고 말하는데, 고흐는 함께 머물자며 권유, 설득, 훈계를 지나 집착을 보인다. 

고흐는 고갱이 떠난 시점에 귀를 자른다. 고흐의 잘린 귀에 대해선 의견이 많다. 고갱이 잘랐다거나, 고흐가 정신 질환으로 인해 자해하라는 환청을 들었다거나, 광견병 상처를 지닌 10대 소녀를 치료하는 데 자신의 귀가 도움이 되고 싶었다거나, 동생 테오의 결혼 소식을 듣고 재정지원이 끊길까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라거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고흐가 자신의 귀를 신문지에 싸서 사창가 카페에 갔던 1888년 12월 23일의 밤은 사실로 알려져 있다. 고흐는 카페를 청소하던 베를라티에게 신문지 더미를 내밀었고 베를라티는 내용물을 보고 기절했다. 

고흐는 귀를 왜 잘랐을까? 본인은 이유를 알까? 원인으로 알려진 의견들이 모두 틀렸을 수도 아니면 그 모두가 다 이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릴 때 술을 마시고 화장실 거울을 주먹으로 깨부순 친구를 알고 있다. 이유를 물었는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고 화가 났다고 했다. 

예전에 고갱과 고흐를 함께 다룬 책을 읽은 적 있다. 고흐를 좋아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 밤의 카페테라스. 그림이 뭔지 예술이 뭔지는 모르지만 따뜻하고 이상하고 상상력 있는 그림들. 자신의 귀를 잘라 매춘부에게 가져갔다는 이야기, 정신병원에서 걸작을 그렸다는 이야기, 살아있는 동안 한 점의 그림 밖에 팔지 못했다는 천재라는 이야기. 그의 그림보다 그의 캐릭터와 얽힌 이야기가 그를 한층 매력 있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게는. 

고갱과 고흐를 다룬 책을 다 읽은 뒤, 책상에 대충 둔 채로 아르바이트를 다녀왔었다. 집에 들어와 '라면 먹고 피시방이나 가야지.' 했을 것이다. 안방문이 열려 있었는데 이젤 위에 밤의 카페테라스가 있었다. 엄마가 그린 그림이었다. 엄마는 내가 책상 위에 팽개쳐 둔 책 안에 실린 아주 작은 그림을 보고 그린 것이었다. 인터넷 검색을 한다거나 프린트로 뽑는다거나 하는 생각은 못하시고 책을 바닥에 펼치거나 화장대 위에 걸쳐 놓았을 것이었다. 너무 잘 그려서 비슷해서 놀랐었다. 엄마는 평생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데 고흐가 누군지 모른다. 

한 번은 화가가 되었다는 먼 친구에게(내 엄마라는 말은 빼고) 엄마 그림을 보여줬다. 그 친구는 그냥 잘 그리는 중고등학생 정도라고 말했다. 엄마는 인상파 입체파 포스트 모더니즘 같은 것은 아직도 모르지만, 내가 바지를 안 입고 밭에서 벌레를 주워 먹을 때부터 지금까지 비슷한 숲과 파도와 꽃을 그리시지만, 나는 엄마의 그림에서 더 깊어진 외로움과 기쁨을 느낀다. 

천재가 좋았다.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책과 영화를 보곤 했다. 미친 사람과 파란만장한 삶이 좋았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도 몰입한 사람은 언제나 멋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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