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32

<구정 이야기> "환영!" 정욱이가 왼팔을 앞으로 내뻗으며 손바닥을 펼쳤다. 버드나무 잎을 때리는 빗소리와 함께 바람이 일었다. 좁은 거실 안에 여러 명의 정욱이 나타나 뛰었다. 숨 가쁜 목소리로 정욱이 다시 말했다. "봐, 봐, 아빠! 모르겠지? 여러 명이지?" "오~ 제법인데?" 거실 벽에 기대앉은 채 티브이를 보던 매형이 빠르게 일어났다. 매형은 뛰어 도는 정욱의 몸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다, 양팔을 들어 가위표로 만들곤 외쳤다. "거부!" 빗방울이 터져나갈 사자후였다. 강아지들처럼 부산스레 뛰어다니던 정욱의 분신들이 사라졌다. "여깄네!" 매형이 정욱이의 손목을 낚아챘다. "아, 뭐야... 깰 파!" 왼 손목을 잡힌 정욱이 오른손을 높이 들어 매형의 머리를 내려쳤다. 열푸른 검기가 손날을 감쌌다. "막을 방!" 매.. 2023. 9. 25.
아버지의 ‘무빙’ 요즘 드라마 무빙을 보고 있다. 1980년대 후반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가 활동하던 시기부터 현재가 배경이다. 초능력을 가진 전직 안기부 특수요원들이 은퇴 후 자식을 돌보며 자영업을 한다. 돈까스 가게, 미용실, 치킨집, 슈퍼마켓, 중고서점 등 장사한다. 등장인물 중 치킨집을 운영하는 장주원(류승룡), 일명 ‘구룡포’에 집중하는 에피소드 내용이다. '아빠는 일용직을 십 년 동안 했다고. 4000일의 일용직으로 집을 샀는데, 자신이 학교에서 일으킨 문제 때문에 모은 돈과 집을 잃었다고.’ 장주원의 딸 장희수가 내레이션 한다. 시간 배경은 장주원이 안기부에서 도망치고 치킨집을 하기 전이다. 장주원은 딸(희수)과 함께 여러 번 이사 다니며 일용직을 전전한다. 몇 년이 지나고 자리 잡은 직장은 탄광이다. 장.. 2023. 9. 12.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 J.D 샐린저/이덕형 옮김, 문예 출판사(1985) 하여튼 12월이었다. 날씨는 마녀의 젖꼭지처럼 매섭게 추웠다._p11 국도를 횡단하자 내가 이대로 사라지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미치광이 같은 오후였다. 무섭게 추운 데다 햇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길을 건널 때마다 흡사 사라져 가는 기분이었다._p13 그가 그렇게 요란하게 끄덕이고 있는 것이 열심히 사색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엉덩이와 팔꿈치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늙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_p17 그는 악수할 때 상대편의 손가락을 마흔 개 정도 부러뜨리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을 그런 유형이었다._p133 앤톨리니 선생은 다시 담배에 불을 당겼다. 악마처럼 담배를 피웠다._p275 그런데 비가 미친놈처럼 오기 시작했다. .. 2023. 9. 6.
등목 무슨 나무였는지 모르겠다. 바람이 몹시 불었다. 바람에 나뭇잎들이 차륵차륵 부딛쳤다. 소나기가 내리는 것만 같은 시원한 소리였다. 나무가 아니라 숲이었고 여름밤이었다. 군대였다. 난 병장이었다. 시간은 0시쯤이었나? 독서실이었다. 책을 읽었다. 소설, 시, 자기계발. 영어 단어와 한자를 외우기도 했다. 공부는 해 본적 없었다. 고졸에 피시방과 알바를 전전하다 입대했고 곧 제대였다. 그래서 군대에서 책을 읽었다. 노크도 없이 몇 평 되지 않는 독서실의 문이 열리고 영화가 고갤 들이밀었다. “역시, 너 있을 줄 알았다.” 난 ‘웬 일이야?’라고 말했던 것 같다. 영화는 내 동기고 친했던 적은 없었다. 내 동기들은 모두 친하지 않았다. 희생이란 말은 천국처럼 멀고 서로 의지한 기억도 없이 병장이 되기까지 비겁.. 2023. 9. 1.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룰루 밀러 지음/정지인 옮김, 곰출판(2021) 오만한 신념은 악마를 만들고, 언제나 구원의 달빛은 사랑뿐._내 감상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야._p316 저자인 룰루는 자살을 시도했던 과학기자다. 저자는 여자인데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연애하는 남자에게 이를 고백한다. 이별하고 오래 괴로워한다. 살아갈 이유와 희망, 기댈 곳과 몰두할 것을 찾는다. 룰루는 1800년 중후반에서 1900년 초중반까지 활동한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인물에게 집중한다. 조던이 십 년 또는 이십 년 동안 수집한 물고기 표본이 지진으로 인해 대부분 소실된다. 소실됐다고 말한 뜻은 물고기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알코올이나 에탄올에 담가두고 이름표를 적었던 유리병.. 2023. 8. 29.